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모자이크라는 다소 특별한 장르를 접했습니다. 미리 그려둔 사람, 집, 산, 들, 구름, 꽃 등의 밑그림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오린 색종이를 조금씩 붙으로 꼭 찍어서 풀에 묻히고, 모양에 가장 잘 맞는 색상을 골라서 신중하게 붙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미술 수업의 목표는 ‘협동과 단결의 수고’였음이 분명합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묵묵했습니다. 참 열심히였습니다. 도화지에 색종이 모자이크를 꽉 채우고 나서 선생님 말씀에 따라 도화지를 높이 들면 반 친구들은 어느 분단의 그림이 더 예쁘고 잘 그렸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던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 우리 인생이 틈사이 어떤 모자이크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출생 후 지금까지 일반적인 틀에 인생이라는 도화지 위에 삶의 색채 없이 그려지고 있고, 그림자라는 그것이 흡사 큰 그림을 완성해 가는 듯하다고 생각하면 그림 같습니다. 태어나면서 받아든 백지 한 장 위에 하루에 몇 번씩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 채색 저 채색으로 다들 수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도화지가 실제로 마무리 단계에 놓이지 않아서 이것이 실패인지 실수인지, 잘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변을 살필 짬이 없어서 자아 집중적 성을 살면서 많은 것들을 놓치는 경우에는, 종국에 그 그림이 꽉 차 보이는 완성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평생 그린 인생이라는 그림이 순간순간 우리의 귀에 대고 우리의 손을 잡고 영원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절대자의 사랑을 외면하여 무미건조한 대량인쇄물이 되어버린 생명의 실종, 영원한 탄식에 다다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무엇을 놓치셨을까요? 가령, 고개를 들고 눈을 들어야만 볼 수 있는 저 하늘에 유독 솟아 있는 태양, 그 태양이 지구를 데우고 광합성 작용을 하고 새고기를 박멸하며 꽃들을 피우게 하는 바, 그렇다면 이 해는 누가 어제에서 내일로 보내며, 그 해가 비추인 곳에 자리한 가느다란 풀꽃과 꽃들에게 생기를 북돋기 위해 내리는 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빛내림과 그들의 향기를 전해주는 시원한 바람이 머무는 곳간은 어디인지,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지, 허락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메마른 대지에 흡복 내릴 비를 위해 때때로 번개를 준비하는 분은 누구신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경계해야할 단순하고도 감상적인 시각일까요. 아닙니다.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오늘도 세밀히도 간섭하시며 자상하게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그를 찾는 자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행복을 위해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시고 모든 것을 이끄시며, 한 치 오차도 없는 무오한 그의 예지로운 우주의 별들과 땅에 기는 작은 개미 한 마리에게부터 거대한 코끼리와, 유순한 우리의 반려견들 뿐 아니라 들짐승과 맹수, 바다의 거대 상어와 작은 투명 멸치까지, 모든 것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돌보고 계심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께 없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그 분, 사탄의 거짓 계락에 걸려 하나님을 배도하고 거역한 아담의 후손의 비참한 죄성과 불구짓는 이 땅에서 아가다들에게 견지시키고, 팔짱을 끼고, 울 약간 지나게 된 지성이나 배로, 명예나 권세 인각적 확신으로 경도된 자세로 절대로 씻어 없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는 구소의 피부와 표범의 무늬로 인생의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만세 전부터 예정하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의 영광의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1-12)